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내가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에 대해. 정작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말과 말 사이의 흥겨움만 찾기에 바빴다.
이랑.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2016.
노엘 갤러거는 자기가 쓴 가사인데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관심도 없다는데. 흥겨움을 먼저 만들고 거기에 말을 붙여 노래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기 안에 어떤 말이 계속 차올라서, 그 말을 달리 내뱉을 방법을 찾지 못해서, 노래하는 이도 있다. 그렇게 터져 나오듯 불리는 말(노래)은 대체로 간절하다.
10년 전쯤 부산에서 홀로 지낼 때 어느 가수의 라이브 영상을 보는데, 어찌나 인상을 쓰며 노래하는지 지켜보는 내 미간도 같이 찌그러질 정도였다. 대체 뭐라 말하고 싶길래 저렇게 애처로운 건지 궁금해 못 배길 그런 표정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말과 말 사이의 흥겨움만 찾기 바빴다고 말하고 있었다.
가수의 말을 들으려 않고 흥겨움만 취사선택하는 건 오독일까? 오아시스의 노래로 구원받은 사람은 수없이 많다. (나도 그런 고딩 중 한 명이었다.) 노래의 본질은 본디 언어 이전의 울림, 혹은 언어 너머의 울림 아니던가? 가사 한 줄 없이도 그 어느 절절한 신파극보다 더 가슴 시리게 맺히는 음악이 얼마나 많은가.
허나 그런 음악에도 기어이 가사를 붙이는 것이 사람이다. 노래의 본질은 어쩌면 ‘말하기’ 아닐까. 어떻게든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말에 흥겨운 곡조를 붙이고, 목소리를 악기 삼아 외치는 것이 노래 아닐까. 말과 말 사이의 흥겨움이 말을 담기 위한 그릇이라면,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앞에 두고 아주 예쁜 식기만을 칭찬할 때 요리사는 어떤 기분일까.
요리에도 노래에도 큰 재능은 없기에, 나는 도면 사이사이에 흥겨움만 넣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흥겨움을 찾고 칭찬하기 때문에, 그것이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진 않은지 묻는다. 가수는 그것이 자신의 언어이기에 노래하는데, 나는 나의 언어로 건축하는지 묻는다. 도면을 바라본다. 도면 사이사이의 흥겨움이 실 꼬인 마리오네트처럼 널뛴다. 내게 말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